Essay

[수필] 김치볶음밥

콜루이케소냐 2017. 3. 15. 11:33



김치볶음밥




어릴 적, 다른 때와 다름없는 여느 한가하고 여유로운 주말. 엄마는 잠시 집을 비우고, 동생은 놀러나가고 아빠와 나, 둘만 집을 보고 있던 날. 아빠는 거실의 큰 티비를 보고 있었고 나는 큰 방의 작은 티비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밥때가 되어 배가 슬슬 고파올 즈음, 나를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딸, 배고프지 않냐고. 어!! 나는 크고 짧게 대답한 후 다시 티비에 빠졌다. 그러고 잠시 있자 부엌에서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서 먹어. 그 소리에 부엌으로 나가보니 식탁에는 아빠가 끓인 라면이 있었다. 그것이 아빠의 요리에 대한 나의 첫 추억이다. 그 후, 한동안은 아빠랑 집에 있으면 라면을 주로 먹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날, 이번에는 나와 동생과 아빠가 집에 있었을때,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빠가 냉장고를 뒤지며 요리할 것을 찾으며 우리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냐고. 그때 우리는 엄마가 평소 집에서 늘 해주던 다양한 요리들을 기대하며 이것저것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빠 그거 못해, 안돼’ 뿐이었다. 그러다 얼떨결에 나온 메뉴가 김치 볶음밥. 그건 가능한 범주 내에 있었는지 아빠는 이번엔 군말 않고 김치를 찾아 요리를 해주더랬다. 그리하여 완성된 계란후라이가 올려진 김치볶음밥. 비록 여러 요리의 대신으로 선택된 요리지만, 짜고 매운걸 좋아하는 나와 동생 입맛에는 딱 맞는, 아주 맛있는 김치 볶음밥이었던걸로 기억한다. 그 후, 나와 동생은 아빠와 집을 보게되면 늘 김치 볶음밥을 해달라고 졸랐었다. 아빠가 짜파게티라던가, 다른 요리들도 몇번 해줬었지만, 그냥 나도 모르게 어느순간부터 아빠가 해주는 요리=김치 볶음밥, 이렇게 머릿속으로 정의되어 버린 듯 싶었다. 물론 내 입맛에 딱 맞았고 계속 생각나고 먹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아빠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요리는 김치 볶음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건 아예 생각도 안했던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아빠한테 김치 볶음밥을 요구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빠가 뭐 먹을래? 라고 물어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거’라고 대답했고 그에 아빠는 군말 않고 김치 볶음밥을 해줬었다. 언제부터였더라. 김치 볶음밥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된게. 그 당시의 나는 솔직히 김치 볶음밥 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음식이 많았더랬다. 고기, 미역국, 돈까스 등등.. 하지만 아빠에게는 그렇게 말했었다. 이 때문에 아빠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김치 볶음밥인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둘만 있게되어 밥을 챙겨먹을 즈음이 되면 메뉴는 이제는 뭐 물어볼래도 아니고, 당연히 김치 볶음밥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고, 물론 좋아하는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왜 아빠한테는 내가 그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김치볶음밥인것 마냥 말했던 걸까. 모든 요리들을 못한다고 거절놓던 아빠를 위한 무의식적인 배려였을까, 아님 체념이었을까, 현실과의 타협이었을까, 아님 그냥 정말 순수한 어린 마음이었을까. 스물다섯이 된 지금도 아직도 그 이유를 스스로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어떤 이유던건 간에, 그냥 김치를 썰어 넣고 냄비에 밥과 볶기만 하면 되는, 가장 만들기 쉽고 기본적이며 간단한, 서툴지만 투박했던 그 음식이, 당시의 나에게는 어느 최고 셰프가 해주는 김치볶음밥보다 훨씬 맛있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아빠와 단둘이 보내는 주말이 없어진 지금, 밥을 집에서 해먹기 보다는 나가서 사먹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된 지금, 가끔은 아빠와 식탁에 둘러앉아 먹던 그 김치 볶음밥이 너무나 그립다.